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데리코 펠리니 (문단 편집) == 그 외에 == * 영화 《[[대부(영화)|대부]]》의 OST를 담당한 것으로 유명한 작곡가 [[니노 로타]]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. 니노 로타는 《백인 추장》을 시작으로, 이후 수십년의 세월동안 펠리니가 감독한 수많은 영화의 OST를 작곡했다. * 본래 풍자적인 만평을 그리던 만화가 출신이었던 만큼 그림솜씨도 좋은 편이었다. 훗날 그가 영화를 제작할 당시에 사용했던 구상용 노트들을 보면 만평 스타일의 재미있는 스케치들을 볼 수 있다. * 특이하게도 그는 [[미신]]을 숭배했으며, 피누스라는 점쟁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하였다. 언젠가는 펠리니가 자신의 영매 친구들에게 자신이 새로 감독한 영화의 흥행성적을 물어봤는데, 두 편이 흥행에서 참패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. 그 예언은 결국 적중하였는데, 정확히는 점쟁이의 예언이 연예계를 떠돌아 다니면서 불안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. * 이탈리아 거장 감독 중에서는 드물게 정치적 견해를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. 중도 성향에 가까웠는데[* 이탈리아 영화계 인물들은 좌파 성향이 강하다.] 말년에 [[실비오 베를루스코니]]를 크게 비난한 적은 있다. * "[[파파라치]]"라는 낱말은 바로 펠리니가 감독한 영화 《[[달콤한 인생]]》에서 유래한 신조어였다. 이후로 파파라치는 유명인사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일컫는 고유명사로 자리잡게 된다. 그래서인지 1993년 [[10월 31일]][*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국에선 젊은 배우 [[리버 피닉스]]가 죽었다. 덕분에 유럽에선 펠리니 죽음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도 못했다.] [[로마]]의 한 병원에서 펠리니가 다발성 뇌출혈 합병증으로 죽어가던 중, 어느 파파라치가 죽기 직전의 펠리니의 모습을 촬영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. 하지만 이탈리아 언론의 결정에 따라 신문사나 잡지사들은 그 사진을 싣지 않기로 하였다.[* 다만, 1993년 12월호 국내 영화지 로드쇼에서 누운 자리에서 숨을 거두기 전 그의 사진을 실은 바 있다.] * 또한 그는 의료팀의 감시 아래 환각제 [[LSD]]를 복용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. 그러나 정작 본인은 끝내주는 환상을 경험하지 못해서 실망했다고 전해진다. * 여담으로 죽기 직전에는 병문안을 온 [[데이비드 린치]]와 만나기도 했다. 데이비드 린치의 자서전 에세이인 《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》에서도 이 일화가 언급된다. * 영화 《사티리콘》은 [[돌체 앤 가바나]] 컬렉션에 영향을 주었다. * [[일본 애니메이션]]에도 많은 영향을 준 감독이다. 일본에서는 1945 ~ 60년대까지 패전 컴플렉스로 미국, 영국 영화보다는 프랑스, 이탈리아 영화가 인기를 끌었는데[* [[마스무라 야스조]] 같이 이탈리아 유학파 감독도 있을 정도였다. 마스무라 특유의 강인한 여성상은 [[소피아 로렌]]에 영향을 받았다고.] 이때 페데리코 펠리니 작품을 보고 연출을 차용한 애니메이션 감독이 많다. [[타키자와 토시후미]], [[야마자키 카즈오]], [[안노 히데아키]] 등이 대표적이다. 한국에서도 일본 영향을 받아 [[라 스트라다|길]]이 인기를 끌면서 꽤 인지도가 높은 전후 유럽 영화 감독에 속하는데, [[김수영(시인)]]이 펠리니의 길을 보다가 아내 김현경을 때린 사건이 문학사적으로 유명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